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이인성,서양과 다른 우리의 향토색을 그리다
<헤럴드경제= 이영란 기자> 화가 이인성(1912~50)은 강렬한 색채와 탁월한 기법으로 한국 근대미술사에 괄목할만한 업적을 거둔 작가다. 그는 세잔이며 고갱의 작품을 끈질기게 연구 모방했으며, 이를 토대로 작업을 연마했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것은 우리만의 향토색이었다. 서양그림의 영향이 그림에 언뜻언뜻 남아있으나, 이인성은 끝까지 대구, 아니 조선의 향토색을 표현하고자 혼신을 기울였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로 해바라기와 옥수수, 사과나무와 화초들이 어지러이 피어있다. 완연한 가을이다. 그런데 그 옆에는 반라의 처녀가 바구니를 낀 채 소녀를 앞세우고 서있다. 이인성의 대표작 ‘가을 어느날’(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이다. 1934년 도쿄에서 열린 제13회 선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이 그림은 수수께끼가 많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청명한 하늘, 나무와 꽃은 분명 가을이건만 여성은 젖가슴을 온통 드러낸 채 화폭 밖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두 인물의 옷차림은 한여름 더위를 연상케 한다. 여름과 가을, 현실과 초현실, 원시와 현대가 한 화면에서 혼재하는 이상야릇한 작품이다. 붉은색 인물과 때묻지 않은 원시는 고갱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이 작품에 대해 미술사가들은 “고갱에서 영향을 받긴 했으나 이 땅의 생명과 인간의 원초성을 그린 것”이라고 평하고 있다. 



엄혹하기 이를 데 없던 1930~40년대 일제강점기에 풍요롭고 상징적인 회화로 한국 근대기를 기름지게 했던 화가, 이인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정형민)은 ‘鄕 이인성 탄생 100주년 기념’ 전을 서울 덕수궁미술관에서 8월 26일까지 연다. 

근대미술계 대표 화가 이인성의 삶과 작품세계를 조명하기 위한 이번 전시는 그동안 ‘천재화가’ ‘아깝게 요절한 작가’로 막연하게 논의됐던 고인를 제대로 조사 연구함으로써 남달랐던 여정을 다시 조망한 기획전이다.

대구 출신의 화가 이인성은 수채화, 유화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서양풍의 그림을 그렸으나 향(鄕), 즉 고향의 흙을 일관되게 추구했다. ‘향토를 찾아서’ 같은 글에서도 밝혔듯 이인성에게 ‘향토’는 고향 대구이자 조국 산천이었다. 그리곤 우리 정서에 맞는 소재와 강렬한 색채, 상징성으로 1930년대 우리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대구 수채화단의 개척자로 꼽혔던 서동진(徐東辰)에게 사사한 이인성은 1929년 18세의 나이에 수채화 ‘그늘’로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첫 입선하고, 스무살에는 특선을 했다. 그의 천부적 재능을 높이 산 대구 유지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이인성은 도쿄의 한 미술용구 회사에 취직했다. 이듬해 다이헤이요미술학교 야간부에 입학한 그는 유럽의 야수파, 후기인상파, 표현주의 등에 빠져들며 작업에 매진했다.

그 무렵 ‘카이유’(1932년)라는 걸출한 수채화로 선전에서 또다시 특선을 차지했고, 1944년까지 한해도 거르지않고 ‘선전’에 출품해 최고상인 창덕궁상까지 거머쥐었다. 또 일본 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제국미술전람회에서도 수차례 입선과 특선을 수상했다. 지독한 가난 때문에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는 관전을 통해 역량을 평가받길 원했고, 잇단 입상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그리곤 1935년 귀국해 대구 남산병원 집 딸과 결혼했다. 아내는 일본에서 의상디자인을 공부한 김옥순이었다. 대구에서 알아주던 유지로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한 장인은 남산병원 3층에 이인성의 작업실을 마련해주었다. 이인성은 그곳에 ‘이인성 양화연구소’를 열었다. 


화가의 개인 연구소는 대구 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흔치 않았기에 그의 작업은 더욱 탄력이 붙었다. 주옥같은 작품들이 쏟아져나온 시기다. 하지만 1942년 아내와 사별하며 작가는 방황하기 시작했고, 1950년 한국전쟁 와중에 술에 취해 귀가하던 중 검문 경찰과 시비가 붙어 경찰관의 총기 오발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았다. 불과 39세의 나이였다.

이번 전시는 근대기 누구보다 치열한 삶을 살았던 한 예술가를 ‘가슴’으로 만나는 자리다. 동시에 충실한 사전 조사와 연구로 그의 족적과 예술세계를 학술적으로 추적한 전시이기도 하다. 그가 남긴 사진과 수집했던 도서, 엽서 등 작가의 숨결이 배어있는 사료를 통해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고인의 지향점과 서구· 일본미술과의 영향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인성은 수채화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강렬한 원색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또렷한 명암법, 짧게 툭툭 치는 촘촘하면서도 율동감 넘치는 붓 터치로 수채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혔다. 또 일본 유학시절에 접한 유럽미술의 화풍을 우리의 토속적인 미감에 대입시키며 유화작업을 통해 향토적 서정주의를 구현했다. ‘조선의 고갱’이라 불리던 그는 강렬한 필법과 탄탄한 구성력, 능숙한 원색의 구사로 식민 지배의 슬픔을 미적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구상 작업은 오늘날 구상 회화에서 튼실한 계보를 잇고 있는 대구 화단의 초석이 됐다.

정물화및 인물화에서 뛰어난 역량을 보였던 그는 세련된 도시감각이 반영된 작품에도 능했다. 전성기에 이르러선 조선의 정조(情調)를 표현하기 위해 힘을 쏟았던 이인성은 ‘경주의 산곡에서’(1935) ‘해당화’(1944) 같은 걸출한 대작을 남기며 한국 근대기를 대표하는 작가의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박수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큐레이터)는 “이인성이 불의의 사고로 숨을 거두는 바람에 향토색 짙은 그의 작업이 좀 더 연속적으로, 뚝심있게 이어지지 못한 점은 우리 근대화단으로선 못내 아쉬운 요소”라고 했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02)2022-0600.

yrl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