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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상은 반복되는 ‘패턴’의 수레바퀴…
은희경 작가의 새 장편소설‘ 태연한 인생’
일상의 틀 갇히길 거부하는 남자
사랑이란 패턴속에서 혼란 겪어

개인의 고유성 지키려 애쓰는
그 남자의 반어적 행동
거짓된 세상속 우리들의 모습


은희경의 새 장편소설 ‘태연한 인생’(창비)은 은희경이 갖고 있는 매력이 좀 더 정교한 패턴으로 그려져 있다.

삶의 이면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반어적 시선과 거리두기, 인물에 대한 통찰과 묘사, 지적인 문장과 정교한 플롯 등 매혹적인 요소들이 긴밀하게 엮이며 좋은 소설이 갖게 마련인 여운과 의문을 남긴다.

소설은 냉소적이고 위악적인 작가 요셉의 일상과 침향무 같은 여인 류의 과거사가 날실과 씨실로 짜이며 탄탄한 조직을 만들어간다.

류의 서사는 부모의 만남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류의 아버지는 공중전화 박스에서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고 전화를 걸고 있는 한 여인의 강렬한 아름다움에 한 순간, 눈이 먼다. 가냘픈 몸매에 희고 투명한 얼굴, 꿈꾸는 듯한 눈과 장미꽃잎 같은 입술, 우아한 목선, 복숭아빛 뺨, 검은 단발머리의 류의 엄마를 보고 무조건 뒤쫓아간다.

류의 안에는 그렇게 무책임하고 즉흥적이며 매혹에 쉽게 몸을 던지는 낭만적인 인간 아버지와 생활과 가족이라는 서사를 유지하기 위해 고독과 고통을 감내하기를 선택했던 어머니가 함께 들어있다.

함께 떠난 가난한 유학 생활에서 류의 엄마는 가정부 노릇을 하며 생계와 학업을 이어가지만 류의 아버지는 기분 내키는 대로다. 여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류의 엄마는 가슴을 억누르는 손동작으로 자신의 고통을 견뎌나간다.

작가 요셉은 위악적이다. 일상의 이데올로기, 무개인성을 혐오스러워하며 일부러 일상의 틀을 거부하며 삐딱하다. 요셉에게 현실을 구축하고 있는 일상의 구조물들은 일종의 무대장치처럼 인식된다. 그 무대 위에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이 연기한다. 속내가 뻔한데도 그걸 감추며 어설프게 역할을 할 뿐이다. 요셉은 이미 만들어진 패턴대로 움직이는 거짓된 세상을 지겨워한다. 무엇보다 요셉의 목소리를 통해 터져나오는 문단권력과 상업주의, 속물성에 대한 비판은 시니컬하다.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에는 계간 창작과비평 연재 당시 머문 토지문화관 작가집필실에서 만난 많은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연재하는 동안 일어났던 일들, 만났던 사람, 눈에 띄는 풍경이 마치 우연이라는 듯 소설의 한 부분을 차지했다”고 말했다.

“소설에 서사가 실종됐다고 비판하는 평론가들 말이야, 그렇게 고정관념에 빠져서 소설을 제대로 읽겠어?”(본문 중)

“요셉이 생각하기에 한국문학에 필요한 소설은 틀에 갇힌 바보들을 화나게 만들 수 있는, 그러니까 패턴을 벗어난 소설이었다.”(본문 중)

요셉은 10년 전, 병원 장례식장에서 오열하는 류를 발견하고 운명처럼 빠져든다. 경청하는 시선, 조심스런 문어체를 구사하는 독특한 패턴을 보이는 류에게 요셉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둘은 S시로 도망쳐 격정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류는 잠적한다. 요셉은 류가 왜 떠났는지 알 길이 없다.

은희경은 세계를 패턴과 이미지로 가른다. 일정한 형태가 반복되는 패턴의 세계는 생활과 이데올로기를 입은 채 완강하다. 이미지는 순간적이며 그 자체로 완결적이다. 거기에 진위 같은 건 없다. 패턴과 이미지는 류의 어머니, 아버지뿐 아니라 류와 요셉에게도 적용된다.

류는 엄마의 서사의 세계, 고통의 패턴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에게도 반복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다르다면, K의 배신과 요셉과의 황홀한 도주 뒤, 남겨질 지겨운 관계의 패턴을 과감하게 거부하고 떠난 것이다.

요셉은 다르다. 틀에 박힌 생각들, 일상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며 개인의 고유성에 집착한다.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기만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까치를 멸시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도 패턴화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랑의 위대함이란 통속성을 거부해왔지만 그 자신 여전히 류를 발견한 순간, 혼란스러워하고 쩔쩔맨다. 그 역시 욕망하는 인간이며, 그 안에 패턴과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요셉의 선택은 거짓된 세상, 자신이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게 돌아가기다. 이야말로 자신의 정해진 일과이며, 가장 안전하다고 여긴다. 태연을 가장한 인생 뒤에는 이 둘의 격렬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 지망에서 영화작가로 돌아선 이안, 돈은 많지만 정체성이 없는 유부녀 도경, 젊음을 발랄하게 소비하는 이채 등 다른 인물들도 패턴과 이미지의 선분 위를 오간다.

패턴화된 세계 속에서 애써 개인의 고유성을 지키려는 요셉의 반어적 행동은 작가가 감내해야 할 고통과 고독, 문학의 존재이유로 읽힌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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