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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업주 LG 구인회>①연암 생가 가보니…배산임수 고택엔 창업회장 조부 만회공의 가르침이 생생
[경남 진주=류정일 기자]소박하지만 기품이 있다. 친근감이 들면서도 범접키 어려운 위엄이 느껴진다. 구슬봉이라 불리는 뒷산은 평안하게 고택을 감싸안고 집 앞을 활처럼 휘감아 흐르는 만궁수(彎弓水)는 풍요롭다.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에 위치한 LG그룹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생가. 일반에 공개가 되지 않아 기와에서 대청, 디딤돌까지, 세세하게는 돌란대, 계자각난간에서 궁판까지 박물관처럼 잘 보존된 모양새다.

승산리는 원래 승산(勝山)이라 불렸다. 마을이 융성할 때는 늘어선 기와집만 200여채에 달했다고 하니 마을의 세를 미뤄 짐작할 뿐이다. 실제 생가 오른쪽에는 부인 허을수 여사의 생가가, 그 옆으로 허준구 전 LG전선(현 LS전선) 명예회장의 생가가 자리잡고 있다. 또 생가 왼쪽으로는 연암의 첫째 동생인 구철회 전 LG 창업고문이 양자로 들어가 살던 집이, 그 옆에는 구자신 쿠쿠홈시스 창업자의 생가가 도열해 5채의 고옥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형상이다.

 
연암의 부친인 춘강 공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모춘당’.

잔디 깔린 생가의 너른 마당 너머로 두 채의 기와집이 보인다. 연암의 조부인 만회공을 추모하는 방산정(芳山亭)이 정면에, 부친인 춘강공을 추모하기 위한 모춘당(慕春堂)이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방산정은 춘강공이 연암과 함께 4칸짜리로 지었던 것을 1956년 동향으로 다시 옮긴 것으로, 마루 기둥 누상주에는 만회공이 지은 칠언절구 한시가 아로새겨져 있다. 철종 때 대과에 급제해 홍문관의 시독관과 사서를 기록 관리하는 춘추관의 기주관을 지낸 만회공이 남긴 한시의 제목은 ‘견국사 일비결귀(見國事 日非決歸)’로, ‘나랏일이 날로 그릇되어 감을 보고 되돌아갈 것을 결심하다’는 뜻이다.

1893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민심이 갈수록 피폐했던 시기, 조정은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원병을 청했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조선에 진주했다. 외세가 날뛰는 모습에 분노한 만회공은 동지를 규합, 상소를 올리는 등 동분서주했지만 한 번 기울어진 국운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결국 귀거래사(歸去來辭) 한 수를 남기고 관직에서 물러나 변방 오지인 승산마을로 낙향한 만회공은 은둔생활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외출을 제외하곤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 단 한 번의 외출이 1931년 손자 연암이 진주 읍내에서 포목상으로 성공해 번창하자 격려차 들른 것이라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손주에 대한 사랑이 한눈에 보인다.

오른쪽의 모춘당은 LG의 최고 기업문화로 자리잡은 ‘인화경영’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곳이다. 연암의 장남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6ㆍ25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새로이 건립했다. 지금도 집안에 새 며느리나 사위를 맞으면 1년에 한 번 함께 모춘당을 찾아 가풍을 익히는 곳으로 쓰인다. 창업회장 생가에서 함께 모여 가훈을 새기고 가풍을 생각하는 곳으로, 이곳 기둥에는 만회공이 내린 가훈이 아직도 선명하다.

‘선비가 세상을 살아감은 도를 좋아하고 분수를 지킴이다’ ‘어버이 섬김에는 효성껏하고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을 다한다’ ‘형제간과 종족 사이에는 서로 좋아할 뿐 따지지 마라’ ‘작은 분을 참지 못하면 마침내 어긋나게 된다’ ‘선대 훈계를 삼가 이어서 바르게 할 뿐 변하지 말라’ 등 10계 덕목이 기둥마다 떠받치고 있는 모춘당의 정신은 지금도 LG의 DNA에 흘러내린다.
 
1961년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자동전화기를 선보이고 있는 연암(가운데). <사진제공=LG그룹>

실제 연암은 6살 되던 해부터 만회공의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효심이나 우애가 남달리 지극했다. 언젠가는 팔촌 작은 누나가 화롯불을 엎질러 장판 한쪽을 누렇게 태운 일이 있었다. 꾸중 들을 일로 걱정이 태산인 누나에게 연암은 “누나야, 걱정마라. 할아버지 오시면 내가 했다 말할게”라고 했다. 누나의 실수를 대신 책임지겠다고 나선 착한 마음씨를 누나는 80세 노인이 될 때까지 잊지 못했다고 한다.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할 만큼 엄격했지만 10계 덕목으로 교육받은 연암은 늘 한결 같았다고 한다. 생가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구본화 연암공업대학 사무처장은 “큰 할아버지(연암)께서는 언제나 인자하고 자애로웠다”며 “10남매의 장남으로서 조부와 부친을 섬기고 자녀까지 4대가 함께하는 대가족을 꾸리면서 형제간의 우애와 화목, 근면성실함을 가통으로 교육하셨다”고 옛 기억을 더듬었다.

ryu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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