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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의 마지막 단관극장 ‘화양극장’ 폐관…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서울에 남은 마지막 단관극장 ‘서대문아트홀’의 영사기가 48년 만에 멈춘다. 마지막 상영작은 1948년 작 이탈리아 고전 ‘자전거 도둑’. 상영시간은 11일 오전 11시와 오후 1시. 입장료는 폐관 기념으로 무료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다급한 공고문과 붉은색 페인트로 위협하듯 적힌 ‘철거’라는 글씨 때문에 밤이면 을씨년스러운 허름한 극장에도 전성기는 있었다. 극장은 1964년 ‘화양극장’이란 이름의 재개봉관으로 개관한 뒤 이듬해 개봉관으로 승격됐다. 첫 상영작은 임권택 감독의 ‘단장록’이었다. 8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 시절 ‘천녀유혼’, ‘영웅본색’ 등의 작품이 이곳에서 상영됐다. ‘천녀유혼’의 주연 배우 왕조현과 장국영이 이곳에서 사인회도 연 믿기 힘든 과거도 있다.

90년대로 접어들며 홍콩 영화의 붐이 사그라지자 극장의 운명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멀티플렉스에 밀려 개봉작 상영은 언감생심이었다. 1998년 ‘드림시네마’로 이름을 바꿔 시사회 전용관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극장은 2009년 ‘서대문아트홀’이라는 세 번째 이름을 달고 노인 전용 복합문화 공간으로 변신을 시도했다. 서울시는 극장에 ‘청춘극장’이라는 간판을 달아줬다. 주머니 가벼운 오래된 청춘들은 가지고 있어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시간들을 추억의 영화 앞에서 소비했다. 관람료는 2000원. 간판뿐인 청춘이어도 노인들은 반가웠다. 지난 3년간 극장 앞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8번 출구는 무료한 노인들의 심적인 해방구였다.

지난해 8월 극장의 건물주가 바뀌었다. 건물주는 극장 자리에 관광호텔을 올리겠다고 선언했다. 극장에 ‘청춘극장’ 간판을 달아줬던 서울시는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이를 허가했다. 시는 지난 3월 ‘청춘극장’을 은평구 연신내역 멀티플렉스 메가박스 8층 1·2관으로 모셨다. 대중교통 노약자석 같은 ‘청춘극장’에서 만나는 ‘신사협정’의 그레고리 펙과 ‘떠날 때는 말없이’의 신성일과 엄앵란이 얼마나 편안할진 의문이다.

김은주 서대문아트홀 대표는 이날 정오 극장 앞에서 삭발키로 했다. 극장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 삭발의 변이다. ‘청춘극장’의 객석은 우리 모두 언젠가 앉아야 할 자리다. 김 대표의 변은 우리 스스로를 향한 조가(弔歌)로 들린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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